매뉴얼 쓰는 사람 테크니컬 라이터

IT Tech 2007. 1. 5. 15:52
[한겨레]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테크니컬 라이터’(Technical Writer)를 아십니까? “제품 품질은 좋은 것 같은데 사용설명서(매뉴얼)를 읽어보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고… 불편해 못 쓰겠어요.” 소니 등 일본 가전업체들은 북미 시장에 진출할 당시 이런 불만에 시달렸다. 상품 포장을 뜯자마자 사용설명서를 꼼꼼히 읽어보는 선진국 소비자들이라 일본어 원본을 조잡하게 번역한 매뉴얼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출시 제품의 매뉴얼을 쓰고 번역·감수를 책임지는 직업이 테크니컬 라이터다. 제품 개발자들이 넘겨주는 초벌 매뉴얼을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게 쉽게 고치는 리라이팅(rewriting)이기도 하다. 이제 매뉴얼은 엔지니어가 대충 써서 넘겨주는 ‘곁다리’ 품목이 아니다. 기능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정보기술(IT) 기기 시장에서 쉽게 읽히는 매뉴얼은 성패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좋은 매뉴얼은 잘 짜인 책과 같다. 그런 책은 목차만 읽어도 무슨 내용이 있는지 눈에 쏙 들어온다. 매뉴얼은 제품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 맨 처음에 나와야 하고, 중요도 순서대로 관련 기능을 배열하게 된다. 이런 것이 잘돼야 매뉴얼의 ‘검색성’이 생긴다. 책을 넘기면 소비자가 원하는 설명이 즉각 나오고, 전반적인 작동 흐름이 눈에 잘 들어와야 한다. 리라이팅의 경우 문장 몇 개만 고치면 되려니 하겠지만, 사실 엔지니어 시각에서 쓴 글이라 설명이 복잡하고 목차가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는 디지털 기기를 구매한 뒤 매뉴얼에 설명이 잘못돼 있어서 피해를 봤다거나 매뉴얼을 읽어봐도 모르겠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도 많다. 기존 매뉴얼을 보면, 고급 종이에 편집은 다채롭지만 정작 들어가야 할 내용이 빠지는 등 기본이 부실한 것도 많다. 매뉴얼에는 ‘문학적 요소’가 침투하면 안 되고, 마른 수건처럼 철저하게 기술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같은 매뉴얼에서 ‘위험’이란 말을 여러 번 쓰게 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위험이란 말의 뜻을 똑같은 의미로 써야 한다. 문학은 동어반복을 싫어하는 반면 매뉴얼은 같은 어휘를 자주 반복하면서 쉽고 간결하게 써야 한다.

테크니컬 커뮤니케이션즈 협회 장석진 사무국장은 “매뉴얼도 제품의 일부이고 휴먼 인터페이스다. 말 못하는 디지털기기와 이용자를 연결해 커뮤니케이션을 하도록 돕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마다 컨버전스 흐름에 따라 기능이 복합화되면서 매뉴얼이 두꺼워지고 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이 나오면서 매뉴얼 제작 주문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매뉴얼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디지털 기기의 고유한 특성을 정확하고 쉽게 알려줘야 한다. 또 소비자가 해당 제품에서 주로 어떤 가치를 얻으려고 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하지만 미국 등에서 테크니컬 라이터는 어엿한 전문직 대접을 받는다. CNN의 <머니 매거진>이 최근 평균 연봉과 10년간 성장 전망을 기준으로 평가한 ‘미국의 50대 유망 직종’에서 테크니컬 라이터는 13위를 차지했다. 의학연구자(15위), 일반 엔지니어(17위), 의료서비스 매니저(28위) 등을 제쳤다. 국내 전문 매뉴얼 제작 업체는 10여 곳에 이른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은 사업부별로 각각 3∼10명의 테크니컬 라이터를 별도로 거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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